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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사회

‘새마을’과 박정희교의 번성에 대해[펌]

                                           새마을’과 박정희교의 번성에 대해

 

                                                                                                                                    -이명재-

 

한국 현대사의 유명한 인물들 중에서 불가사의한 인물을 꼽으라면 나는 김영삼 전대통령을 들고 싶다. 그건 최근 그의 언행을 보고 들으면서 드는 생각인데 그의 말이나 행태는 이른바 ‘존경할 만한 전직 대통령’의 부재를 아쉽게 하는 차원이 아니라 정상적인 인간의 양식과 교양을 의심케 하는 수준이다. 불가사의란 이런 이가 어떻게 대통령이 됐는지, 아니 그 이전에 어떻게 야당 지도자로 수십년 간을 한국 정치를 이끌어왔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인물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맞수로 대접했다는 점은 그의 과욕을 넘어서서 한국 정치계의 불가사의이며 나아가 괴이한 일이라고까지 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에 대한 실망을 얘기하고픈 생각은 별로 없는데 결국 반성해야 할 것은 그를 키워준 국민들의 안목이며 한국 정치의 실력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김영삼씨의 최대 과오가 무엇인지에 대에 얘기하고픈 게 있을 따름인데, 흔히 말하는 것처럼 그의 가장 큰 실정은 외환위기를 초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이를 그의 책임이라고 일방적으로 단죄하기에는 그로서 억울한 면이 있다. 수십년간의 누적된 모순이 그에 와서 폭발한 것이랄 수 있기 때문에 외환위기 사태의 모든 책임을 그에게 지우는 건 공정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 그보다 내가 진정 그의 과오라고 하고 싶은 것은 그로 인해 한국 사회에 ‘박정희’를 되살려낸 것에 있다. 외환위기가 그 중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는 자신의 무능과 과오로 무덤 속에 누워 있던 ‘박정희 귀신’을 불러냈다. 그를 복권시켰을 뿐만 아니라 일거에 추악한 독재자에서 영웅으로 올려 놓았다. 유신 반대 투쟁이 달아오르던 75년에 박정희와 영수회담을 가진 뒤 석연찮은 침묵으로 박정희를 살려 준 그가 사후의 박정희를 다시 한 번 살려준 것이다.

 이렇게 일본군 중위 다카기 마사오, 경쟁 후보의 유세를 방해하겠다며 일요일에 모든 공무원을 가족 야유회로 징발하고, 예비군을 소집하고, 모든 고궁과 극장을 무료로 개방하는 치졸한 꼼수를 부린 ‘찌질한’ 인간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살아난 박정희의 망령은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활보하며 군림하고 있다.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서 지금 박정희의 망령은 하나의 신령이 돼 살아 있다.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없더라도 이미 사당 없는 사당들이 즐비하며, 그를 교주로 받드는 십자가 없는 교회들이 무수하며, 보이지 않는 동상들이 곳곳에서 우리를 굽어보고 있다. 성장은 곧 토건이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부자 되세요’라는 신흥 주술의 유행에서, ‘하면 된다’는 해묵은 구호의 건재에서 우리는 박정희의 소리없는 육성을 듣고 있다. 빵과 재물을 얻으면 자유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천박한 물신주의에서 방울을 흔들며 주문을 외는 박정희의 굿판을 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사상 유례 없는 천박한 정권의 출현은 돌연변이가 아니라 박정희 현상의 결과일 뿐이다.

 심각한 것은 박정희 망령이 우리의 골목, 일상에까지 더욱 깊숙이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새마을’이라는 간판을 단 식당이 성업중인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스스로 박정희의 자발적 포로가 돼 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심각한 병리를 본다. 새마을은 무엇이었던가? 그건 새마을이 아닌 마을의 파괴였다. 4대강이 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강을 죽이고 있듯 새마을운동은 새 마을을 만들겠다며 실은 마을 공동체를 죽인 것이었다. 신경림 시인의 <민요기행>에서 그 새마을로 바뀐 마을의 한 풍경이 그려져 있다. 시인은 80년대 중반 민중 생활의 소중한 자산 전통인 민요를 채록하고 녹음하러 갔을 때의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가 노래를 듣고 있는 동안 이장은 전화 받으라는 소리에 연신 방을 들락거렸다. 지서에서 누가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묻는 전화가 자꾸 걸려오는 것이었다. 주민들로부터 신고도 들어오고 게다가 사진 기자가 사진을 찍다가 걸리기까지 했다. 우리는 처음에는 이름과 직업만 대었다가 다음에는 주소와 주민등록증 번호까지 대었으나 지서에서는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어, 마침내 이장이 인사까지 끝내고 나오는 우리들을 동구 밖까지 뒤쫓아와서 우리들의 한문 이름까지 적어가는 곤욕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이 ‘새마을’의 한 풍경이었다. 1930년대 일제가 조선 농촌의 좌익화를 막기 위해 대대적으로 벌였던 조선농촌진흥운동을 모델로 박정희가 시작한 새마을 운동은 환대와 우정의 공동체인 우리의 농촌 마을을 이렇게 살풍경한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듣자하니 ‘새마을 운동의 날(4월 22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고 한다. 각종 ‘새마을 사업’은 더욱 날개를 달게 될 것이다.  우리의 골목길 안에 더욱 많은 ‘새마을’이 들어올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와 함께 종교 아닌 종교 ‘박정희교’도 더욱 번성할 것이다. 그것이 무섭다. 그리고 무서운 만큼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출처 :  한겨레 훅 http://hook.hani.co.kr/archives/255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