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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비판

이병철의 종교적 질문에 대한 차동엽 신부의 답변 반박하기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죽기 직전에 남겼다는 종교에 관한 질문이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이병철 회장의 필경사가 받아 썼다는 이 질문지는 당시 가톨릭대 교수 정의채(86)씨가 87년 고(故) 박희봉(1924~88) 신부로부터 전해받아 간직해 왔다고 하는데, 이 질문에 대해 24년만에 정의채씨의 제자인 차동엽(53) 신부가 답변을 했고, <잊혀진 질문>이란 책으로 출간되었다. 나는 이를 천주교의 공식적인 답변으로 봐도 좋을 듯 하여, 무신론자로서 일일이 이를 반박하는 댓글을 단다. 

 

1. 신(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들어 내(표준말->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답) 우리 눈에는 공기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공기는 있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의 영역정해져 있다. 가청영역 밖의 소리는 인간이 못 듣는다. 그러나 가청영역 밖의 소리에도 음파가 있다. 소리를 못 듣는 것은 인간의 한계이고 인간의 문제다. 신의 한계나 신의 문제가 아니다.

 

반박- 차 신부는 과학적 지식을 끌어들여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신의 존재를 설명하고 있다. 이 같은 설명은 초등학생의 사고 수준이다. 보이지 않는 공기는 바람 부는 걸로 간단히 증명되고, 인간이 듣지 못하는 소리가 있다는 것은 과학이 밝혀낸 지식이다. 결국 인간의 한계라면서도 자신은 인간을 뛰어 넘어 신을 흉내내고 있다.

 

-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가령 개미와 코끼리를 보라. 개미는 이차원적인 존재다. 작고,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에겐 평면만 존재한다. 입체도 개미에겐 평면이 된다. 그런 개미가 코끼리 몸을 기어 다닌다. 개미는 코끼리 몸을 느낀다. 그러나 코끼리의 실체를 파악하진 못한다. 왜 그런가. 개미의 인식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코끼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반박- 비유지만 이 말은 바로 거짓임이 드러난다. 개미에게는 평면이 거의 없다. 공항 활주로가 인간에게는 평면이지만, 개미에게는 울퉁불퉁한 땅으로 인식된다. 개미와 코끼리의 비유는 초등학생의 사고수준이다. 개미(결국 인간)의 인식능력에 한계가 있다면서, 자신은 마치 코끼리(결국 신)를 볼 수 있는 동료 코끼리라도 되는 양 인간을 빗댄 개미를 설명하고 있다.

 

- 결국 개미는 코끼리를 모르는 건가?

 

아니다. 개미는 코끼리를 느낀다. 코끼리의 부위에 따라 다른 질감을 느낀다. 신과 인간의 관계도 비슷하다. 인간도 그렇게 신을 느낀다. 우리가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할 뿐이다. 신은 자신의 존재를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이미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현대물리학에선 우주의 차원을 11차원이라고 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 너머의 차원까지 관통할 것이다. 3차원적 존재가 11차원적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겠나. 흑백TV로 3D 컬러 영상물을 수신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반박- 모든 개미가 코끼리의 피부 질감을 느낀다. 그러나 인간은 아니다. 믿는 사람만 느낀다고 믿을 뿐이다. 여기서도 차 신부는 과학적 지식을 끌어와 신의 대변인 행세를 하고 있다.

 

2.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답) 성경에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돼 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처음 기록됐다. 그리스어로 말씀은 로고스(Logos)다. 로고스의 뜻이 뭔가? '원리'다. 다시 말해 '존재원리'를 뜻한다. 그러니 요한복음서의 첫 구절은 '태초에 존재원리가 있었다'가 된다. 우주에는 기가 막히게 섬세한 질서가 있다. 결국 그러한 존재원리, 그리도 섬세한 질서의 근원이 무엇인가라는 거다.

 

반박-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는 신약 바이블은 그리스인, 즉 사람이 썼다는 증거가 될 뿐이다. 신이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 것이 인간이 만든 책으로 증명된다고 보나?

 

- 그 근원은 뭔가?

 

만물의 창조주로서 신의 존재는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신을 만날 건가의 문제다. 만나면 증명이 되는 거니까. 그럼 신을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가톨릭 신학생 시절, 수업시간에 은사 신부님을 통해 고(故) 최민순(1912-75) 신부님의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최 신부님은 아침 수업에서 이런 시상(詩想)을 내놓았다고 한다. 꽃을 본다 / 꽃의 아름다움을 본다 / 꽃의 아름다우심을 본다. 이 구절을 듣는 순간, 제겐 충격이었다.

 

반박- 차 신부는 위에서는 바이블을 증거로 내밀더니, 이제 증명의 문제가 아니고 체험의 문제라며 도망친다. 체험이라면 모든 개미가 다 코끼리의 피부 질감을 느끼듯, 인간이면 누구나 다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만이 주관적인 체험을 이야기한다. 신을 만나면 증명이 되다니? 시상이 떠올랐다는 것이 신을 만났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 왜 충격이었나?

 

우주의 철리(哲理)가 사통팔달로 뚫리는 기분이었다. 꽃의 아름다움, 나무의 아름다움, 땅의 아름다움, 하늘의 아름다움이 모두 하나의 고백이다. 변화하는 이 아름다움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신 분이 아니면 누가 만들 수 있겠는가. 결국 한 송이 꽃을 통해서도 신을 체험할 수 있고, 그 체험이 자신에겐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되는 거다.

 

반박- 시상이 떠오른 것을 신을 만난 증거라고 보는 억지 논리다. 반어법을 쓴다고 해서 신의 존재가 증명될 리도 없고, 개인적인 체험을 가지고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라고 할 수도 없다. 증거 없이 신의 존재를 믿는다면, 마찬가지로 증거 없이도 얼마든지 신은 부정될 수 있다.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 아닌가?

 

답) (차 신부는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 150돌, 물리학자-신부의 열린 대화'라는 대담을 중앙일보(2009년 2월 5일자 21면, 9일자 25면)에서 한 적이 있다. 차 신부는 물리학계의 거두인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와의 대담에서 '신이 인간을 빚었나'라는 물음에 소상하게 답한 바 있다. 당시 대담 내용을 끄집어내며 차 신부는 답을 이어갔다).

 

'하느님이 실제 진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이해 방식은 3차원적 사고에 갇힌 거다. 그런 생각은 신앙적으로 더 큰 잘못이다. 초월적 존재의 하느님을 인간의 3차원적 사고 안에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걸 떠나 계신 분이다. '신이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건 단지 은유적 표현이다. 오랜 세월에 걸친 진화의 과정을 '흙으로 빚었다'는 말로 축약했다고 봐도 된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대립적 관계가 아니다. 지구의 환경, 우주의 환경은 끊임없이 변한다. 신이 창조한 생명체도 변화하는 환경에서 생존하려면 끝없이 진화해야 한다. 그런 진화를 인정한다. 그러나 진화론은 창조론이란 더 큰 울타리 안에 포함된 개념일 뿐이다.

 

반박- 은유적 표현이란 것은 결국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 기독교(천주교)인들은 어떤 것은 사실이고, 어떤 것은 은유적 표현이라고 편리하게 해석한다. 그럼 신의 존재도 은유적 표현으로, 결국 사실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 진화론은 창조론의 울타리에 갇힌 개념이 아니고, 울타리를 뜯어내는 개념이다. 

 

4.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답) 과학이 발달할수록 무신론자가 늘어날까?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있다. 1916년 미국 과학자 중 40%가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했다. 당시 조사를 했던 제임스 류바는, 미래의 과학자는 무신론자 비율이 크게 늘어날 거라고 예측했었다. 그런데 1997년 영국의 과학잡지 네이처에 실린 연구결과를 보면 딴판이다. 81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미국 과학자의 40%가 여전히 유신론자라고 나왔다. 그 81년간 과학 발전의 총량은 엄청났다. 그럼에도 신의 존재를 믿는 과학자의 비율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반박- 위 자료의 신뢰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한 과학잡지의 연구결과만 가지고 판단하는 건 옳지 않다. 나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속에 나오는, 이와 반대되는 자료를 신뢰한다.

 

- 과학과 종교, 대립적 관계가 아닌가?

 

과학과 종교는 대립적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과학이 발달할수록 신의 섭리가 과학을 통해 더 명쾌하게 증명될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했던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렇게 말했다. '약간의 과학(A little science)은 사람을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러나 더 많은 과학(More science)은 인간을 다시 신에게 돌아가게 한다.'

 

반박- 과거 기독교는 과학을 힘으로 억눌렀다. 이것과 관련한 교황의 사과도 근래 있었다. 기도교적 사고에 갇힌 사람만이 신에게 돌아가려 할 것이다.

 

5.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죽음과 불행을 주었는가?

 

답) 어쩌면 우리가 신을 사랑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바로 고통이다. 이슬람 최고의 신비주의 시인 루미(1207-1273)는 이렇게 말했다. "로 우리를 돕고자, 그 분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 / 물이 흐르는 곳이면 어디든지 / 생명이 피어난다 / 눈물이 떨어지는 곳이면 어디든 / 신의 자비가 드러난다."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한다. '신을 믿을 건가, 말 건가'조차도 선택의 대상이다. 고통의 뒤에는 선택이 있고, 그 선택 뒤에는 자유의지가 있다.

 

반박- 이슬람 신비주의 시인의 시를 끌어 와, 사랑의 통로가 고통이라고 하니 참 궁색한 답변이다.  이럴 때 쓰는 편리한 낱말이 '자유의지'다. 답변이 궁색하면 끌어다 대니 말이다.

 

- 그럼 고통은 언제 오나?

 

고통은 주로 자유의지를 엉뚱하게 썼을 때 온다. 우리의 선택이 신의 섭리, 그 섭리의 궤도에서 벗어날 때 고통이 찾아온다. 그래서 고통은 일종의 '경고 사인'이다. 신의 섭리, 우주의 존재 원리, 그 궤도를 다시 찾으라는 신호다. 가령 불에 손을 넣으면 어떻게 되나. 뜨겁다. 고통스럽다. 그래서 재빨리 손을 뺀다. 만약 고통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손이 다 타고 만다. 고통과 불행과 죽음은 올바른 궤도를 찾기 위한 신호다.

 

반박- 이것도 위와 마찬가지로 궁색한 답변이다. 1번 답변에서 인간을 개미에 비유하면서 자신은 마치 코끼리가 되어 내려다 보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6.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예; 히틀러나 스탈린, 또는 갖가지 흉악범들)

 

답) 신이 악인을 만든 것이 아니다. 신은 자유의지를 주었을 뿐이다. 우리 같은 신부는 독신이라 잘 모르겠지만, 부부관계도 비슷하리라 본다. 어떤 부부는 상대방을 가두고 소유하려고 하고, 어떤 부부는 상대방을 믿고 자유를 준다. 최고의 사랑은 결국 상대방에게 자유를 주는 사랑이다. 그 자유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다. 그러니 신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지 않나. 그 사랑을 엉뚱하게 쓰는 이들이 악인이 될 뿐이다.

 

반박- 답변이 궁색하니 편리한 낱말 '자유의지'가 또 등장한다. 프레시안에서도 이 질문에 답한 개신교인 윤재석씨가 '자유의지'를 들먹였지.

 

7.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 두었는가?


답) 죄는 히브리어로 하타(Hata),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다. 과녁을 빗나간 상태란 뜻이다. 과녁이 뭔가? 기준이다. 어떠한 기준을 벗어난 상태가 죄라는 얘기다. 우주에 깃든 섭리, 그런 섬세한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이 죄다. 그럼 신은 왜 우리가 죄를 짓게 내버려 두실까? 그 역시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반박- 기준을 벗어난 상태가 죄? 이래서 기독교를 죄인의 종교라고 한다. 노예사상이다. 기준을 옛날 미개인이 쓴 책 속에서 찾는가? 인간의 도덕 기준은 고대 바이블에서 나오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은 문명사회의 도덕 기준에 맞지 않는 바이블 구절은 애써 비유라고 보고 재해석하려 한다. 답변이 궁색하면 나오는 게 '자유의지'다. 천주교, 개신교를 가리지 않고 나온다.

 

8.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답) 구약성경은 1000년 동안 사람의 입을 통해 구전되던 이야기를 기록한 작품이다. 이것을 짜맞추고, 모자이크해 보니 어떤 그림이 나왔다. 그 그림을 봤더니 하느님 그림이었다. 긴 세월, 여러 사람, 다양한 음성을 통해 나온 말이 어쩌면 그렇게 합치될 수 있을까? 물론 표본오차 수준의 편차도 약간 있다. 그건 성경을 기록한 사람의 어투와 성격이기 때문이다. 신·구약 성경에는 전체 이야기를 관통하는 일괄된 기조가 있다. 그걸 볼 때 성경의 원저자는 저 위에 계신 분이고, 성령이고, 이 밑에 있는 사람들이 입과 손과 가슴을 빌려준 것이라고 본다.

 

반박- 구전되던 이야기를 기록한 작품이라면 결국 '전설의 고향'이라는 이야기다. 가정법을 쓴다고 허구가 사실이 될 수는 없다. 증거 없이 어떤 것을 믿을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그것은 증거 없이도 얼마든지 부정될 수 있다. 바이블이 성령으로 (인간에 의해) 쓰여졌다는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9.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답) 벼락이나 천둥이 칠 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신을 찾는다. 마취 직전, 수술대 위에 누운 이들도 기도를 한다. 무신론자도 슬픔에 직면하면 본능적으로 하느님을 원망한다. 그래서 '참호 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도 있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존재이다. 그래서 무한을 동경한다. 영원을 갈망한다. 그런 염원이 하나의 형식이 됐을 때 종교가 된다.

 

반박- 이걸 답변이라 할 수 있나? 소수의 행동을 일반화한 억지 논리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고 본다. 신을 찾기보다 엄마를 찾지 않을까?  "엄마야 !"

 

- 종교는 인간에게 왜 필요한가?

 

인간은 영원을 찾다가 자꾸 벽에 부딪힌다. 부딪힐수록 무한에 대한 동경은 커진다. 결국 동경하던 무한성에 '신'이란 이름을 붙인 거다. 그 무한성을 인격체로 여긴 사람들이 그걸 숭배하게 되고 도움 받기를 청하는 거다. 자신이 그 벽을 넘어설 수가 없으니까. 결국 인간은 종교라는 터널을 통해 영원을 갈망하는 거다.

 

반박- 역시 종교적인 일부 사람들의 개인적인 생각을 일반화한 일반화의 오류다. 이 답변에서 '인간'을 '어떤 개인'이라고 해야 옳다. 일부의 사람만이 '동경하는 무한성'에 '신'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신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10. 영혼이란 무엇인가?

 

답) 그리스 철학은 유신론이 아니라 자연철학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세가지 혼이 있다고 한다. 生魂(생혼)과 覺魂(각혼) 그리고 영혼이다. 모든 생물의 중심에 생혼이 있다고 한다. 나무나 풀에도 생혼이 있다. 나무의 수명이 다하면 생혼도 죽는다. 다음은 각혼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감각하는 동물에겐 생혼과 각혼이 있다. 그리고 사람에겐 생혼과 각혼에다 영혼까지 있는 거다. 물질계를 초월하는 생명현상, 그게 영혼이라는 거다. 영혼이 제대로 작동할 때 우리는 본래의 인간에 더 가까워진다.

 

반박- 이것도 개인 생각일 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혼의 분류가 왜 나오나? 어쨌거나 따져 보자. 위와 같다면 생혼은 다른 말로 생명이다. 동물은 물론 식물도 생명이 있다. 그러나 죽으면 더 이상 생명체가 아니다. 각혼은 넋이 되겠다. 넋은 살아있는 동물의 체내에 있어 마음의 작용을 주재한다고 생각되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사고작용이 되겠다. 개미의 사고력과 코끼리의 사고력, 인간의 사고력이 깊이의 차이는 있지만, 그 본질은 같다. 생각하는 힘이다. 영혼은 죽은 사람의 넋이다. 당연히 사람에게만 있는 걸로 간주된다. 짐승에게 영혼이 있네 없네 하는 것은 정말 우스운 짓이다. 넋은 살아있는 동물 체내에 있는 것이므로 죽은 사람에게 넋이 있을 리 없다. 결국 육신의 죽음과 함께 영혼은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생명체를 초월한 생명현상이 있을 리 없다.

 

11. 종교의 종류와 특징은 무엇인가?

 

답) 크게 계시 종교와 자연 종교가 있다. 유대교와 그리스토교, 이슬람교는 계시 종교이다. 힌두교와 불교는 자연종교에 속한다.

 

반박- 종교의 종류를 그렇게 나누는 거였어? 기독교(크리스트교)가 계시종교라고? 리처드 도킨스가 말했지. 잘못된 믿음을 주는 세 가지 나쁜 근거-그것은 '전통', '권위', '계시'라고 말이야.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내적 감정에서 어떤 것이 사실임에 틀림없다는 느낌을 받게 될 때, 그들은 그것을 '계시'라고 부른다지. 그런 느낌에 대해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말이야. 각기 다른 수 많은 종교인들이 계시를 이야기하면 그 많은 종교가 다 사실일까? 새로운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나타나 어떤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이 새로운 사이비 종교를 인정하고 믿고 따라야 하는 걸까? 계시라는 건 한 사람의 내면적인 느낌에 불과한 것이다.

 

12.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종교인들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나?

 

답) 예전에는 천주교밖에는 구원이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다. 거의 구원이 없다는 수준으로 얘기했다. 그러다 바뀌었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전환점이었다. 천주교가 좀 더 합리적으로 반성하고, 성찰하고, 다른 종교의 면면을 공부해 보니 천주교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았던 거다. 그 후에 입장이 바뀌었다.

 

반박- 회의를 통해 바뀌기도 하는 게 교리인가? 허허 참.

- 어떻게 바뀌었나?

 

'타 종교의 구원 여부는 신이 결정할 문제이다. 우리는 모른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65년 이전에는 개신교도 다른 종교와 구분없이 남으로 봤다. 그런데 65년 이후에는 '갈라진 형제'라고 부른다.

 

반박- 모른다는 입장으로 바뀌기 전에는 잘 안다고 큰 소리쳤겠군. 앞으로도 또 바뀌고 갈라지고 하겠지?

 

13. 종교의 목적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천주교만 제일이고, 다른 종교는 이단시하나?

 

답) 앞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대신하겠다. 내용이 겹친다.

 

반박- 천주교는 조금 덜한 걸로 알지만, 뿌리가 같은 개신교와 이슬람교는 정말 배타성이 심하지 않은가?
 

14.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답) 죽음 너머의 세계는 객관적 검증이 불가능하다. 이 물음에는 나의 주관적인 신념으로 답을 할 수밖에 없다. 이 한계를 미리 고백한다. 교황 요한 23세는 임종 때 이런 말을 남겼다. "이제 나의 여행 채비는 다 되었다." 우리는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표현한다. 왔던 곳으로 다시 갔다는 뜻이다. 육체는 흙에서 왔으니까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느님에게서 왔으니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반박- 결국 기독교의 사후세계(천국과 지옥)는 근거가 없다는 소리군. 영혼이 '하느'에게서 왔다는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수정란이 착상되기도 전에 영혼이 하늘나라에서 만들어져 있었거나, 아니면 착상 즉시 만들어졌다는 얘기니, 혈육관계도 부정해야 할 판이네. 옆집 복남이네 신생아에게 들어간 혼이 나와 관계가 없듯, 내집에서 태어난 신생아의 혼도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 되겠군. 영혼은 만들어지기만 하고 죽지는 않으니 천국이나 지옥은 영혼이 득시글거리는 곳이겠다.

 

- 강한 증거가 있나?

 

12사도의 죽음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자발적인 죽음을 택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고, 안드레아는 X자형 십자가에서 순교했다. 12사도가 모두 그랬다.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들은 죽음을 불사했을까? 답은 하나다. 영원한 생명이 있다. 이걸 증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12사도의 죽음이야말로 강력한 증거다.

 

반박- 참 억지스럽다. 답은 하나고, 그 답이 '영원한 생명을 증명하는 것이라니? 12사도의 자발적인 죽음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이 어떻게 천국이나 지옥을 증명한다는 것인가? 그리고 또 하나. '증거'는 명사(이름씨)지, 여기에 '-하다'를 붙여 동사(움직씨)로 쓸 수는 없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증거하다'란 엉뚱한 동사를 만들어 쓰는 잘못을 저지른다. '증거하다'가 아니라, '증명하다' 또는 '증거를 대다'로 써야 하는 것이다.

 

15.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답) 개그프로를 보면 '이 더러운 세상'이란 유행어가 있었다. 불공정한 사회라는 거다. 악인이 버젓이 잘 살고 있을 때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의심한다. 부조리 현장에서 신이 침묵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공정 사회를 만드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탐욕이다. 한국이 불공정 사회라면 그걸 책임지고 개선해야 할 주체는 신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다. 앞서 말했듯이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까지 기회를 주는 거다. 죽기 전에 악인이 회개할 수 있고 새롭게 출발할 수도 있는 거다. 여기서 우리는 오히려 신의 자비를 본다. 벌은 사후 또는 종말 때 주어진다.

 

반박- 또 그놈의 '자유의지'인가? 그럼 신은 대체 이승에서 무얼한다는 것인가? 저승만을 관장한다는 염라대왕과 같은 존재인가? 차라리 염라대왕을 믿고 말지.

16.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약대(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답) 그건 나눔을 강조한 예수님의 메시지다. 부자에도 여러 종류의 부자가 있다. 이웃과 잘 나누는 부자가 있다면 당연히 천국에 가지 않겠나. 주위를 보라.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 선택에 따라 선인이 되기도 하고, 악인이 되기도 한다. 100% 선인도 없고, 100% 악인도 없다. 부자도 늘 그런 선택 앞에 선다. 그 선택에 따라 부자는 선인이 될 수도 있고 악인이 될 수도 있다.

 

반박- 하나 마나 한 소리군. 바이블의 메시지에 따른다면 부자 중엔 악인이 많다는 소리일 텐데......

 

17. 이태리 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천주교도인데, 사회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으며, 세계의 모범국이 되지 못하는가?

 

답) 이 물음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탈리아에서 직접 살아보면 상당히 질서가 있다. 물론 마피아가 있지만 그건 극소수의 범죄집단일 뿐이다.이탈리아 국민의 평균적 윤리의식, 그들의 기준은 엄정한 편이다.

 

반박- 차 신부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천주교도가 많으면 도덕적인 사람도 많아야 할 것인데, 이태리가 모범적인 국가라고 주장하지도 못하는 걸 보면, 기독교가 국민의 도덕성 향상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얘기 아닌가?

 

18.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답) 이 질문에 100% 동의한다. 다를 바가 없다. 똑같다. 이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가 어우러질 때 조화로운 신앙이 가능하다. 이 셋 중 하나가 지나치게 발달하면 몽상가나 다혈질 행동파가 될 수도 있다. 주로 '오직'을 강조하는 사람이 광신도가 될 소지가 많다. 오직 믿음, 오직 실천, 오직 성장, 오직 복지, 오직 우(右), 오직 좌(左), 오직 사랑, 오직 정의도 다 위험한 것이다. 종교든 이념이든 보편성을 잃을 때 미치게 되는 거다.

 

반박- 종교나 공산주의나 모두 세뇌성이 강한 탓이다. 온건한 신앙이 광신을 부추기는 거다. 신앙이나 공산주의는 이성적인 사고가 아니다. '오직 예수'를 외치는 광신도도 많지 않은가?

19.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고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나?

  예; 폴란드 등 동구제국, 니카라구아 등.

 

답) 공산주의는 천주교 신자가 택한 것이 아니다. 천주교에서 이탈한 무신론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거다. 공산권에서 종교는 탄압의 대상이었다.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협력 관계나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반박- 천주교 신자가 공산주의를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소련의 간섭 아래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한 것이지, 그들이 대부분 무신론자였다고 해서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 무신론과 공산혁명이 무슨 상관이람. 스탈린과 후세인이 콧수염을 길렀다 해서 콧수염 기른 사람이 독재를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공산주의가 종교를 탄압한 것은 어떤 종교가 다른 종교를 배타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20.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답) 통계청 조사를 보면 종교인의 범죄 비율보다 비종교인의 범죄 비율이 더 높다. 그나마 종교인이 범죄 수치를 낮춘 거다. 그럼에도 이 질문이 시사하는 바를 깊이 수용할 필요가 있다. 종교인이 더 사회정화 기능을 하지 못하고, 더 성숙하게 살지 못하고, 좀 이기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형식만 그리스도인이지, 내용은 안 바뀐 경우도 많았다. 빛과 소금 역할, 부족했던 건 사실이다.

 

반박- 질문은 '교회신자의 범죄'라고 했지 '종교인의 범죄'라고 하지는 않았다. 왜 '종교인의 범죄'로 뭉뚱그려 말하는가? 그리고 비종교인의 범죄 비율이 종교인보다 높고, 종교인이 범죄 수치를 낮추었다는 데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오히려 파렴치한 범죄는 기독교인이 더 많이 저지른다는 심증을 가지고 있다.

 

21. 로마교황의 결정엔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답) 교황의 무오류권(무류권)을 말한다. 가톨릭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오해가 있다. 무오류권은 교황좌에서 특별한 교리, 엄중한 진리의 문제에 관해 천명할 때 무오류권을 발동한다. 주로 기준이 애매할 때 이 기준을 따르라고 천명하는 것이다. 아주 드물게 발동된다. 그러나 무오류권이 발동된 사안도 시간이 지나면 수정될 수 있다. '타 종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도 무오류권이 발동된 사안인데, 결국 수정했다.

 

반박- 신의 교리가 기준이 애매할 수도 있나? 엄중한 진리라면서도 무오류권이 발동되나? 그리고 무오류권이 발동된 사안도 수정될 수 있다면, 결국 성령이 썼다는 신의 교리가 거짓말이라는 것 아닌가?

 

22.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수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답) 신부는 예수님을 대리해 양떼를 돌보는 사람이다. 1965년(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만 양떼였다. 65년 이후에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양떼다. 수도원 소속인 수녀와 수사는 다 수도사다. 그들은 자신을 전적으로 투신해 영혼의 갈무리를 하는 사람이다. 신부와 수녀의 독신은 '나는 여기에만 헌신합니다'라는 서원이다. 기혼과 독신이 섞여 있다가 13세기부터 사제는 독신이 됐다. 수도사는 그 이전부터 독신수도 생활을 했다.

 

반박- 왜 신도들을 하찮게 양떼로 보고, 또 제멋대로 양떼를 지구상의 모든 인구라고 수정하는가? (신부 아닌) 사람은 다 양떼고, 신부만 (양떼를 돌보는) 사람이란 말인가?  독신이 아니면 양떼를 돌보지 못하는가? 수도한다면 혼자서 제 몸이나 돌볼 일이지, 누구를 돌본다는 것인가? 신부나 수녀가 결혼하지 않는 것은 천주교의 교리이고, 이것은 천주교가 인간 본성을 억압하는 종교라는 뜻이 된다. 이로 인해 천주교에서 아동 성학대나 동성애가 이따금 문제로 불거지기도 하지 않는가?

 

23.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 당하는 자로 단정, 기업의 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데,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인하는 것인가?

 

답) 이 문제는 역사성 안에서 봐야 한다. 우리나라에 노동 착취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전태일씨 등은 하루 15시간 이상 노동했으니까. 그런데 모든 기업주가 착취자라고 하면 곤란하다.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는 어디나 있다. 좋은 기업인도 있고 나쁜 기업인도 있다. 그건 개별적인 사안이다. 교회는 자본주의 체제를 부인하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이미 실패했다. 다만, 교회가 자본주의 체제의 부작용이나 폐해에 관심을 갖는 건 맞다. 거기에 약자와 소외된 자가 있기 때문이다.

 

반박- 좋은 기업가도 있고, 나쁜 기업가도 있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노동자의 인권이 이나마 신장된 것은 노동자들의 투쟁의 결과다. 기업가들이 시혜적으로 베푼 것은 아니다.

 

24.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답) 종말이 언제일까? 내가 죽는 날이 종말이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오메가 포인트(종말의 시점)가 있을 거다. 지구의 수명이 다 하는 날이 올 테니까. 성경에는 종말이 있다고 돼 있다. 그런데 이 종말을 보는 시각이 좀 다르다. 파국만은 아니다. 구원을 위한 최종 추수의 시간으로도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갈린다. 종말을 기대하는 사람과 두려움에 떠는 사람. 신앙인의 특권은 종말을 희망사건으로 본다는 것이다. 종교는 결국 종말 너머를 향하기 때문이다. 

 

반박- 뭔 소리야? 바이블이 신의 말씀이라면서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본다는 건 결국 헛소리란 얘기 아닌가? 종교가 종말 너머를 향하기 때문이라니? 지구의 종말로 인간이 사라진다면 종교도 사라질 것이다. 기독교가 쓸데없는 종말론을 퍼뜨려 세상에 끼친 해악은 가볍지 않다. 천문학적으로 지구의 종말이 있을지라도 이것은 아주 먼 미래의 일일 뿐이고, 지레 겁먹고 두려워 하거나 종교에 심취할 필요는 전혀 없다.

 

이상의 24가지 질문에 대해 다양한 종교적 답변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종교니까.

증거 없이 혹세무민의 '설'을 만들에 건전한 사고를 좀먹는 것이 곧 종교라고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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