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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사회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를 다시 생각한다 [펌]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를 다시 생각한다
노무현과 이정희, 시나리오 없는 공통점

(서프라이즈 / 이기명 / 2010-08-01)


칭찬이 지나치면 과장이 되고 넘치면 결례가 된다. 표창장 줄 때 쓰는 공적사항과는 다르다. 그래서 칭찬이 어렵다. 있는 그대로 생각나는 그대로 쓴다. 그러나 이 글은 칭찬을 위해 쓴다. 소신으로 쓰는 것이다.

이정희 의원은 이제 민주노동당의 대표다. 여성으로 정당의 대표가 된 몇 명이 있지만 별 신경 안 쓰고 칭찬할 만한 것도 생각이 안 난다.

항상 말하지만 나에게는 사람을 보는 기준이 있다. 지나온 과거다. 사람은 여러 과정을 통해 하나의 인격체가 되지만 인격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많은 계기가 있다.

노무현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최악의 환경에서 성장했다. 고구마로 아침을 때우고 학교에 가던 초등학교 시절을 가끔 얘기했다. 고등학교도 장학금이 없었으면 못 갔을 것이다. 머리 좋고 불의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담을 쌓았다. 초등학교 때 이승만 찬양 글짓기 집단 거부사건은 참 맹랑했다.

병역의무 마치고 뒤늦게 열심히 공부해서 고시에 합격했다. 고시하려고 병역기피 하지 않았다. 판사 이후 변호사를 하면서 그의 소망은 가족들이 자기처럼 고생하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가난은 지겨웠다. 정말 싫었을 것이다. 그냥 똑똑한 변호사였다.

변호사로서 열심히 돈을 벌었다. 승소율 높은 변호사로 명성을 얻었다. 만족한 삶이었다. 모두들 부러워했다. 그는 소외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배려를 했을까. 노무현이 잊지 못하는 후회가 있다. 교통사고를 낸 운전사의 아내가 변론을 의뢰했다. 착수금을 받았고 접견도 했다.

얼마 후 의뢰인이 합의를 봤다며 계약금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규정을 내 새우며 거절했다. 눈물을 흘리는 운전사의 아내가 남긴 원망 서린 말 한마디. ‘변호사는 다 그렇게 먹고사느냐.’ 그 눈물은 노무현에게 항상 빚이었다.

 

우연히 시국사건을 맡게 됐다. 부림사건이다. 군부독재 시절 부산 대학생들을 옭아 넣은 독서회 사건이었다. 변호사조차도 믿지 못해 말을 안 하는 대학생들의 시커멓게 멍든 몸을 보며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엄혹한 현실에 대한 절망이 그를 인권변호사로 만들었다. 아스팔트 변호사가 됐다. 경찰과 기관원이 머리를 흔드는 운동권 변호사가 됐다.

그 후 사건 수임을 하지 않았다. 수임료 없는 시국사건만 맡았다. 대우조선 파업, 이석규 사망 사건과 관련하여 구속되고 변호사 자격도 정지됐다.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노무현의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이정희 대표를 말한다면서 왜 장황하게 노무현을 말하는가. 이정희 대표에게서 노무현을 보고 노무현을 생각하면 이정희 대표가 겹쳐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무엇인가. 소외된 사람들의 대한 연민이었다. 아무 잘못도 없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불의한 틀로 해서 공평치 못한 대우를 받고 말도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었다. 미안함이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인권이었다.

노무현이 운전기사 부인에 대한 죄의식에서 고통을 받았다면 이정희는 무엇이 고통이었던가. 그는 다음과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동두천에서 만난 어떤 여성에 관한 기억이다.

만남이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역사 속에서 만날 수 있다. 사건 속에서 만날 수도 있다. 이정희가 만난 동두천의 여성은 누구일까.

1992년 10월 28일 새벽, 동두천에서 케네스 이병에게 무참하게 살해된 윤금이 일수도 있고 2002년6월 13일 훈련 중인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어린 여학생 효순이와 미선이 일 수도 있다. 그들을 대하면서 흘린 이정희의 눈물. ‘울보 이정희’의 눈물은 분노인가 슬픔인가. 기도인가.

지도자에 대한 국민의 믿음과 사랑과 존경은 어디서 오는가. 일관된 행동과 약속의 이행이다. 자신의 이익에만 매몰되지 않고 나 아닌 타인의 이익과 행복에도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이다.

자신을 모두 버리는 희생이 아니라도 나도 생각하지만 좀 더 많이 타인을 배려하고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만원 버스라도 함께 타고 가는 고통분담이다.

국민이 소망하는 지도자는 예수나 석가와 같은 성인이 아니라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사람이되 남을 배려하는 사람. 자신의 우월한 지위와 남보다 훨씬 편하고 대우받는 생활을 할 수 있으면서도 때로 그것을 포기할 줄 아는 그런 인간을 원한다.


사람들은 ‘바보 노무현’이라 하고 ‘울보 이정희'라고 한다.
노무현과 이정희의 모습을 보면서 국민들은 부마항쟁과 대우조선 파업과 청문회와 촛불집회, 기륭전자 파업, 쌍룡자동차 파업, 용산참사 등이 서로 어우러져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저 투쟁만 하는 싸움꾼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가슴속에는 늘 인간에 대한 따듯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 두 별명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착하다는 것이다. 바보는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 해칠 줄을 모른다. 요즘 세상에 똑똑한 악인보다는 차라리 바보가 그리운 것도 바보는 해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울보’는 약한 사람이다. 약하기 때문에 운다. 할 수 있는 것은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없기 때문일까. 내가 좋아하는 시 구절에 이런 것이 있다.

‘눈물은 누군가를 위한 기도’라는 시 구절이다. 누군가 미워서 흘리는 눈물이라 할지라도 눈물 속에는 간절한 염원이 있다. 악의 소멸을 바라는 간절한 기도다.

닭장차에 강제로 태워져 끌려가는 이정희의 절규와 눈물과 부산 조방 앞에서 터지는 최루탄 연기 속 모두가 흩어져 버린 아스팔트에 바위처럼 눈을 감고 앉아 있던 노무현, 두 사람의 공통점은 ‘바보’와 ‘눈물’이었다.

전두환 정주영 장세동 등 법 위에 사는 사람들을 떨게 했던 청문회에서의 노무현과 국무총리와 국세청장 청문회에서 오만한 그들의 머리를 떨구게 한 이정희의 공통점은 불의는 응징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고 믿는다. 거짓에 대한 분노였다.

이정희는 어릴 적 단칸방에서 살다가 연립주택으로 이사를 한 기쁨과 안정된 생활과 삶,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들이 현장에서 자신의 뒷덜미를 잡았다고 했다. 겁이 났다고 했다.

돈 잘 버는 변호사로 가족의 안정된 행복이 보장된 변호사의 미래를 포기하고 가시밭길 인권변호사의 길을 선택했을 때 노무현이라고 왜 겁이 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들은 선택했다. 편한 길을 포기하고 얻은 것은 약자들로부터 받은 사랑이었다. 국민이 준 신뢰였다.

이정희는 정치는 연출이 아니라고 했다. 정치는 결국 진심으로 하는 것이며 약삭빠르고 제 앞길만 찾고, 제 이익만 추구하고 만날 거짓말하는 그런 정치를 깨야 하고 깰 수 있다고 했다.

국회의원직은 귀중하게 써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 내놓을 수 있다고 했다. 쌍용차 때도 파업현장에 들어가면 입건될 거라 생각했고 의원직을 상실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3당 합당 후 국회의원으로 한계를 절감하고 노무현이 의원직 사퇴서를 낸 것과 언제고 의원직을 버릴 수 있는 이정희의 소신이 국회 앞을 지날 때마다 귀하게 느껴지는 느낌이다.

진보신당은 이제 흔적만 남았다. 왜일까.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가 취임식에서 한 말이다. 진보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뜬구름 같은 논리로 진보를 말하는 대학교수 논객들의 말씀에는 질렸다.
“진심의 정치, 유연한 진보로 강한 민주노동당을 만들겠다.”“거친 구호나 작은 차이에서 진보의 정체성을 찾지 않고, 시대와 국민이 요구하는 과제를 위해서는 우리 안의 작은 고집이라도 내려놓고 가장 먼저 희생하고 헌신할 것이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무지개처럼 현란한 언어인가. 사방을 철벽으로 막아버린 불통인가.

소통이다. 말을 해야 서로 마음을 알 것이 아니다. 나를 따르라는 한마디로 맹종을 요구하면 지 새끼들도 안 따른다. 하물며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정희는 분명히 말했다. 대통령을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진보정당들의 꿈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정희의 꿈이기도 할 것이다. 정치를 하면서 대통령 꿈꾸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진위는 모르겠으되 어느 정치인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한민국 대통령 김ㅇㅇ이라고 책상머리에 써 붙였다고 하지 않던가.

어떤 꿈을 꾸어도 좋다. 꿈을 이루는 데는 노력과 경쟁이 따른다. 공정하게 비겁하지 않게 추하지 않게 당당하게 경쟁해야 한다. 지금도 훌륭한 경쟁자들이 많다. 서로 격려하며 성장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랴.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것은 공정한 경쟁도 아니고 성공도 안 된다. 지금이 총칼로 대통령 되는 시대도 아니고 거짓으로 대통령 되는 때도 아니다. 노력을 해서 이루어야 한다. 자신 없으면 포기해야 한다. 정치도 망치고 자신도 망친다.

이제 노무현은 우리 곁에 없다. 노무현은 점차 이 땅에 신화가 되어 간다. 노무현이 신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

노무현의 죽음이 그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한으로 남아있어도 노무현은 그렇게 국민들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

이 땅의 유일한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 노무현. 그들과 함께 울고 웃던 노무현. 강대국의 부당한 요구에 결코 무릎 꿇지 않고 당당했던 노무현. 그런 지도자를 국민은 그리워한다.

속 빤히 들여다보이는 잔꾀와 술수로 권력을 장악해 보려는 쓰레기들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 한 송이. 비록 세찬 비바람이 몰아친다 해도 이겨 내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나기를 기원한다.

국민들은 안다. 왜 국민들이 ‘바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선택했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또한 ‘울보 이정희’를 보호해야 하는지.

그것은 바로 자신들과 자신들의 후손과 내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지도자를 가진 국민처럼 행복한 국민은 없다.

 

2010년 8월 1일
이 기 명 (전 노무현후원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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